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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비극

해피곰 2014. 4. 27. 11:41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비극

 

 

온 나라가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시민들은 이제 분노할 힘마저 없어 보입니다. 아니 한 신문

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이건 나라가 아닙니다. 봉건왕조와 국민국가의 가장 큰 차이는 법과 제

도를 통한 국가운영입니다. 상비군과 직업공무원 관료집단의 출현은 국가를 형성하는 중요한

축입니다. 그만큼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월호 사고를 통해 대한민

국 관료조직의 민낯을 매일 목도하고 있습니다. 재벌의 자식은 미개한 국민 탓을 하고 부패한

언론은 진실을 감추기에 급급합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법과 원칙입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법과 원칙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국가운영의

신념과 가치가 된 이후로 법과 원칙은 시장권력에 무한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 둔갑했습니다.

 

고삐 풀린 자본의 탐욕에 저항하는 모든 이들은 무능한 국가권력과 부패한 언론으로부터 법과

원칙을 어긴 자들로 매도됐습니다. ‘돈보다 생명을 주장한 보건의료노동자들은 병원 경영

어렵게 만드는 강성 노조원으로 내몰렸고, ‘이윤보다 안전을 주장한 철도노동자들은 철도적자

의 주범이 돼 버렸습니다. 생명과 안전이라는 가치는 기업 이윤논리 속에 비용으로 전락해 버

렸습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상품에만 매겨지는 가격보다 못한 처지가 돼 버린

것이죠.

 

우리나라 최대 여객선이라는 선전 문구는 요란했지만 정작 그 배의 선장은 비정규직이었습니

. 갑판과 기관부 업무 대부분은 비정규직 선원들로 채워졌습니다. 불안정고용 노동자들에게

맡겨진 해상안전도 비정규직 신세와 다를 바 없는 불안정의 상시화였습니다. 해운사 사주일가

의 재산이 수천억원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본은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과적은 기본

이고, 화물의 결박장치도 비용절감을 위해 뒷전으로 밀었습니다. 승객을 버리고 먼저 탈출한

선원들의 잘못은 무엇으로 변명해도 용서받을 수 없지만 안전교육조차 받지 못하는 비정규 노

동자들에게 직업의식을 강조하는 보수언론의 논조 역시 역겨울 따름입니다.

 

규제는 암 덩어리, 공무원들은 진돗개 정신으로 무장하고 규제를 혁파하라는 어명이 떨어지기

가 무섭게 각 부처는 규제해소 경쟁에 돌입했습니다.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참사가 나기 전부

터 선박안전규제를 완화했습니다. 승객과 선원의 안전이 우려된다는 지적에도 해수부는 업체

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국내 연안 운항 선박에 대한 각종 안전규제들을 축소하거나 폐지

했습니다.

 

2009년 경찰청장 출신 허준영씨가 철도공사 사장으로 부임한 이래 철도파업에 대비한다는 이

유로 비조합원들과 사무직들에게 열차운전면허를 무더기로 발급했습니다. 실제 운전경력이 전

혀 없는 이들에게 열차운전을 맡긴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파업 대비'라는 가치가 '

차 안전'보다 우선인 것입니다.

 

지난해 철도 민영화 저지 철도파업 기간에도 대체인력으로 투입된 무자격 승무원들과 대학생

들의 기기취급 오작동으로 사고가 잇따랐습니다. 사고가 나더라도 철도파업을 막기 위해 벌어

진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합니다. 급기야 국토교통부는 철도분할로 신설되는 회사에 기관사

들을 저비용으로 공급받기 위해 관련 법령을 개정해 고속열차운전면허 관련 규제를 완화하겠

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철도공사에서도 수년간 일반열차를 운전한 경력소유자들에게만 면허취

득 조건이 부여되는 고속열차 운전면허도 불필요한 규제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근본 원인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 자본천국으로 전락한 우리 사회 가치의 붕괴

에 있습니다.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되고 국민이 행복하다는 주술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참

사는 반복될 것입니다. 죽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아이들과 승객들에게 우리가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하는 것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가치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동하기 좋은 나라가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나라입니다.

 

왕조시대에도 가뭄이 길어지면 왕이 기우제를 지내고 자신의 부덕을 탓했지만 아직까지 박근

혜 대통령은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으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엄단만 되풀이하고 있습

니다. 그래서 이건 국민국가는 고사하고 왕조시대도 아닌 것입니다.

 

매일노동뉴스 / 철도노조 지도위원(전 민주노총 위원장) (krw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