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 주 애빙던에 사는 캐서린 럼슈랙 할머니는 요즘 무르익은 봄을 만끽하며 정원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정원 일은 해마다 취미 겸 집안일 삼아 하는 것이지만 올해는 과거와 조금 다른 게 있다. 정원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노인들과 함께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햇볕이 따사한 날이면 여러 명이 함께 정원 가꾸기를 하며 수다를 떤다. 1주일에 두세 번은 함께 음식을 만들어 식사를 한다. 설거지도 함께 한다.
하지만 이들이 양로원 같은 노인 복지시설에 사는 것은 아니다. 정원과 클럽하우스를 함께 쓰지만 각자는 엄연히 독립된 자기 집에서 산다.
럼슈랙 할머니는 최근 미국의 중장년들 사이에서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코하우징’(공동 주거)의 대표 격인 ‘엘더스피릿 커뮤니티’의 주민이다.
엘더스피릿은 워싱턴에서 서남쪽으로 560km 떨어진 애빙던의 3.7에이커 땅에 조성된 작은 마을이다. 29가구 38명의 노인이 살고 있는데 전직 교수, 정원사, 목사, 간호사, 펀드매니저 등 다양한 직업 출신이 모였다.
이곳보다 규모는 작지만 미국의 첫 실버 코하우징으로 2005년 입주를 마친 캘리포니아 주 데이비스 시의 ‘글레이시어 서클 커뮤니티’는 그야말로 ‘독립된 생활’과 ‘이웃은 제2의 가족’이란 개념이 더욱 화학적으로 긴밀히 결합된 커뮤니티다.
2002년 3월 교회 교우를 중심으로 뜻이 맞는 24명이 모여 구상을 가다듬으면서 글레이시어 서클의 탄생은 시작됐다. “독립된 사생활을 존중받으면서도 노년의 외로움과 혼자 사는 불편함을 덜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동체를 만들어 보자”는 데 의기가 투합한 이들은 수시로 모여 새로운 ‘유토피아’의 청사진을 구체화해 갔다.
교회 신자 가운데 공동주택 개발 전문가가 있어 도움을 받고 변호사와 건축 설계사를 고용했다. 중간에 포기하고 나간 사람을 제외하고 최종 8가구가 남았다. 마침내 논의 시작 3년 만인 2005년 봄 입주가 시작됐다.
하늘에서 보면 이 마을은 그린벨트에 인접해 녹음이 우거진 0.83에이커의 땅에 3동의 큰 건물이 들어선 형태다. 북쪽 건물은 3채의 타운 홈(단독주택을 세로로 붙여 놓은 형태)으로, 남쪽의 건물은 5채의 타운 홈으로 구성돼 있다. 두 건물 사이에 공동 정원이 있고 그 옆엔 클럽하우스(공동 건물)가 있다.
각각의 타운 홈 내부는 완전히 독립된 주택이다. 현재 입주민 8가구는 4쌍의 부부와 8명의 독신 노인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 16명의 연령은 70∼84세. 심리치료사, 교사, 교수, 작가, 물리학자, 과학자 등 다양한 직업 출신인 이들 중엔 40년 이상 알고 지낸 이웃도 있다.
실내에 들어가 보면 노인들의 일상을 세심히 배려해 지은 집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화장실 문은 폭이 90cm 이상이다. 휠체어를 타고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넓게 만든 것이다. 타운 홈 8채 가운데 6채는 단층이고 2채는 2층이다. 2층 집도 계단에 전동 의자를 설치할 수 있도록 디자인됐다. 원할 경우 1층을 침실로 바꿀 수도 있다. 실내 면적은 28∼112평으로 집마다 다르다.
클럽하우스 같은 공동 건물은 2층짜리 건물이다. 회식을 할 수 있게 주방과 식당이 갖춰져 있다. 2층은 1인용 아파트인데 간호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에게 저렴한 가격에 세를 내줬다. 이 공동체에 고용된 간호사는 아니지만 필요할 경우 도움을 준다는 조건이다.
주민들은 클럽하우스에서 1주일에 한 번씩 회의를 연다. 회의 전에 커뮤니티의 ‘헌장’을 함께 읽는다.
“우리의 관계는 신성한 것이다. 대화할 땐 서로 경청한다. 서로의 재능과 창조적 생각의 차이를 존중하며 서로에게 인내심을 갖는다….”
회의에서 내리는 모든 결정은 합의제다. 새로운 잔디 깎기 기계 구입, 커뮤니티 명의의 자선기금 헌납 등 주제는 다양하다. 편의상 의장, 서기, 회계의 역할 분담도 있다.
의장이 “대형 냉동고가 한 대 있어야겠다. 누가 전문 판매점에 갔다와야겠다”고 하자 금방 손이 올라온다. 누군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 생기면 항상 이처럼 먼저 자원자를 모집한다. 누가 아프면 의사를 불러 주는 것은 물론 다들 와서 돌봐 주는 걸 의무처럼 여긴다. 잡초 뽑기, 눈 치우기, 낙엽 치우기 같은 집안 잡일을 이웃과 함께 하면서 ‘놀이’로 만들어 간다.
진지한 회의가 끝나면 회식 시간이다. 클럽하우스에 마련된 주방에서 함께 따듯한 음식을 만든다. 설거지도 함께 하거나 돌아가면서 당번을 정한다.
2002년 첫 모임때 부터 주도적 역할을 해온 엘렌 코펙(여) 씨를 비롯한 주민들은 “이곳에서 제2의 가족 같은 이울을 선택했다”며 “프라이버시를 존중받되 보살핌을 공유하자는 발상”이라고 말했다. “우리 나름의 포틀럭(각자 음식을 준비해 와 나눠 먹는 파티) 공동체”라는 비유도 나왔다.
이 공동체가 만들어지기까지는 가구당 평균 40만 달러(약 3억8000만 원)의 투자비용이 들었다. 입주 후엔 매월 커뮤니티 운영비로 350달러가량을 낸다. 집은 개인별로 등기되어 있고 공동공간은 공동 등기되어 있다.
엘더스피릿의 경우 집 한 채에 9만 달러에서 11만4000달러에 분양됐다. 한 달 운영비는 150달러 수준.
하지만 사실 아무리 교회 교우, 이웃 등으로 친한 사이라 해도 제2의 가족처럼 지내야 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건축 설계를 맡은 줄리 하네이 씨에 따르면 기존에 살던 넓은 단독주택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타운 홈으로 주거공간이 바뀌는 데 대해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개개인의 개성이 달라 지붕과 처마의 색깔을 정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각 타운 홈 내부의 구조와 장식은 개개인이 정하게 했다.
주민들을 일일이 만나 단독주택에서 사용하고 있는 가구의 크기를 재 보고 새 집에 맞을지를 알려주는 등 세심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개성의 일부분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단점일 수 있으며 너무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사교성이 부족한 성격이라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코하우징 전문 상담업체인 엘더코하우징 네트워크의 선임 상담역인 케이티 디라그랑제 씨는 “사생활과 공동생활의 조화가 코하우징의 가장 큰 장점”이라며 “주민들은 공동체 문화에 참여함으로써 덜 늙는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현재 미국에는 플로리다 주의 세인트피터즈버그, 캔자스 주의 위치토 등 6곳에서 실버 코하우징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고 있다.
젊은 시절 코뮌, 히피 공동체와 같은 개념에 익숙했던 베이비 붐 세대가 노령기에 접어듦에 따라 인구학자들과 개발업자들은 이런 코하우징이 점점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전미은퇴자협회(AARP)의 조사에 따르면 50∼65세 인구의 22%가 코하우징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계획에서 완성까지 3년 이상 걸리는 기간을 줄이고 복잡한 제반 과정을 대행하는 업체도 많이 생기고 있다.
특히 응급 상황에서 도와줄 이웃이 있고 보안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안도감도 강점이다. 특히 실버 코하우징은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자며 단체생활을 해야 하는 ‘양로원’과 그저 노인들이 모여 사는 개념인 ‘실버타운’에서 진전된 새로운 노후 주거 및 사회생활 형태다.
초기 비용으로만 보면 코하우징은 비슷한 규모의 새 집을 사는 것에 비해 비용이 더 들면 더 들지 결코 싸진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전체 비용의 5%가량은 진행비용으로 든다.
하지만 장기적으론 비용이 절약된다는 분석도 많다. 공동난방 등을 통해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고 각종 장비도 공동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잔디 깎는 기계나 자전거는 물론 자가용 차량까지 공유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 미국엔 실버 코하우징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지만 대학 공동체 등 90여 개의 코하우징 커뮤니티가 조성돼 있다. 이들 코하우징 주민들을 대상으로 서포트파이낸셜서비스라는 콜로라도 주 소재 금융회사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주민의 70%가 10년 이상 계속 살 계획이라고 답했다.
지난 15년간 코하우징 주택 가격은 같은 투자금을 주고 산 다른 일반 집값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코하우징 주택이 다른 주택에 비해 부동산 투자 가치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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