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9월, (사)전국귀농운동본부가 결성돼 귀농 민간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지, 만 8년이 넘어섰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도시민의 귀농은 쉬운 일이 아니다. 농업환경이 어려운 것은 물론 정책적 지원이 미흡하고, 타 지역사람에 배타적인 농촌의 정서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나이 먹으면 농사나 짓지'라고 생각해서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이에 본보는 창간 25주년을 맞아 '귀농, 도전의 현장에서'를 테마특집으로 보도하고 현장의 사례를 주1회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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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6월10일경 출하에 앞서 정식에 들어간 국화를 살펴보고 있는 귀농인 차성열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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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시 상월면 숙진리에서 딸기를 재배하는 택배딸기작목반(작목반장 오세중). 5명의 반원 모두가 도시에서 고향으로 내려 온 귀농인이다.
이들은 요즘 '택배딸기농사'에 승부를 걸고 있다. 인터넷에 들어가 야후 또는 네이버 검색창에서 택배딸기를 검색하면 바로 이들의 홈페이지에 연결되는데, 매일 오후 4시까지 입력된 주문내역을 확인, 포장작업을 하고 오후 5시에 택배로 발송한다. 주문만 하면 다음날 바로 신선한 무공해 딸기를 식탁에서 먹을 수 있으니 소비자들의 호응도 높고 수입도 짭짤하다. 특품(2㎏)이 2만∼2만2000원 정도로 1일 평균 주문량은 특품 기준으로 100상자여서 1작기에 1억원이 넘는 수입을 거두고 있다.
귀농인 중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이를 농촌마을에 적용하는 사례도 있다. 음악가인 도완녀 씨는 91년부터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에서 메주를 생산·판매하기 시작해 현재는 270평 규모의 메주공장에 1500여개의 장항아리를 갖추고 있으며, 음악을 활용한 판촉 활동으로 연간 매출도 7억여원에 달한다. 이같은 공로로 지난해 제20회 강원도농어업인대상 가공유통부문 대상을 시상하기도 했다. 노루궁뎅이버섯을 일본에 수출하는 정선군의 이상수 씨도 일본 농업연수로 뚫은 일본시장을 공략한 노하우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천 부래미미술관 관장인 김영국 씨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귀농을 했으나 농사 짓는 데에는 지역민들이 나보다 훨씬 앞서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배우고 있다"며 "그러나 마을 농촌 관광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도시민들을 유인하는데는 내가 기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해 그 분야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1년 전에 귀농한 차성열(40) 씨도 눈에 띄는 귀농자다. 충남 계룡시 금암동 600평 규모의 국화 재배하우스를 운영하는 그는 충남도의 국화시험장과 인근 화훼농가로부터 자문을 받아 노하우를 습득, 지난해 11월 생산과 출하의 맛을 봤다. 생산한 국화 5만2000본 중 1만2000본을 지난해 11∼12월 한 달여 동안 수출, 국내 내수용보다 3배의 소득을 올렸다.
"귀농 당시 전혀 준비 없이 온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는 차성열 씨는 "자신의 영농과 관련된 기술과 마케팅을 습득하고 지역 사회와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와 정책을 숙지한다면 누구든지 귀농 후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지역사회 부적응·열악한 복지·교육여건 '높은 벽' 철저한 영농준비 기본·전공분야 특화방안 찾아야
■ 암
성공한 귀농인도 있지만 실패해서 다시 탈농하는 사람들도 많다. 귀농운동본부 관계자에 따르면 성공한 귀농인은 귀농자의 30% 미만. 정착한 사람 중에도 지역사회의 적응 때문에 적지 않는 고통을 겪게된다.
그 이유는 농촌사회의 배타성과 함께 시장개방에 따른 농업환경의 변화, 농촌교육의 피폐, 복지여건의 미비, 열악한 주택환경 등 전반적으로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데 있다.
대학을 마치고 80년대 중반 양평군 강상면에 정착한 J모씨는 "농업이 시장개방으로 점점 부가가치가 낮아지고 있다"며 "한 작목을 선택해 전문화하더라도 점차 소득이 줄어 농산물만으로는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이들 교육 때문에 농촌을 지킨다는 것은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J씨는 현재 농산물 생산이 중심이 아니라 풍물패 활동으로 지역 문화활동을 펼치면서 관광농업을 주요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다.
농대과학을 졸업하고 충북 괴산에서 버섯농사를 짓고 있는 K씨는 "시장개방으로 농업환경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지역사회의 타지 사람에 대한 배타적인 성향도 정착에 어려움을 준다"며 "지역공동체 활동에도 어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소한 사업추진에도 사사건건 간섭하려 하고 일을 방해하려는 성향이 많아 어떤 때는 괜히 귀농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K씨는 또 "다른 사람에게는 귀농을 권하고 싶지 않다"며 그 이유에 대해 "우선 농촌의 복지가 열악해 도시 변두리만도 못할 뿐만 아니라 교육여건까지 계속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강원도 정선군에서 정착한지 10년이 넘는 J모씨는 "시골에서 이렇게 농사만 짓다가는 장가는 절대 갈 수 없을 것"이라며 "농사지으며 보람을 느끼는 것도 어렵지만 결혼도 못한 놈이 미래에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고 회의감을 비쳤다.
귀농문제는 이처럼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지역사회 적응과 결혼 및 자녀교육 문제의 해소도 중요한 과제다. 귀농한 경험이 있는 농업관련단체의 K모씨는 "농사를 짓는다는 이유만으로 선을 봐도 퇴짜를 맞을 뿐만 아니라 농장 내 작은 공사도 공무원이 감시하는 등 차별대우가 많고 결혼한 가정의 경우 부인이 화장실의 불편 등 생활 환경과 주변 복지시설의 부족을 호소한다"며 "이에 대한 정부차원의 대책이 없이는 귀농의 활성화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민연태 농림부 경영인력과장은 "요즈음 농촌에는 아기와 어린 학생마저 드물기 때문에 외부인력이 유입되지 않으면 장차 농업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며 "귀농을 목적으로 한 창업농 등의 정책사업은 앞으로 점점 확대해 나가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귀농형태>
▶유형1 / 무리한 투자 '실패 지름길'
도시에서 개인기업에서 노무일을 맡던 K씨. 그는 불황으로 직장을 잃고 귀농을 단행했다. 고향에 몇 마지기 논과 작은 텃밭으로 K씨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영농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K씨는 몇 차례 지도소와 농업연수기관의 교육을 받고 정부자금으로 양액재배에 투지키로 하고 첨단설비를 갖춘다. K씨는 평당 2만원에 가까운 투자비를 들여 양액재배 설비를 마치고 토마토재배를 시작하게 된다. 토마토를 계속 출하를 했지만 2년후 가격폭락으로 융자금 이자를 갚기에도 버거웠다. 연간 평당 1만원의 수익도 못올리는 현재로선 평당 2만원의 융자금을 갚기에도 어렵다.
▶유형2 / 대학 때부터 꾸던 꿈 '현실로'
장래 과학영농을 꿈꾸며 대학에서 원예학을 전공한 P씨는 원예를 함께 전공한 친구들과 동시에 외딴 시골에 땅을 마련해 영농을 시작한다. P씨는 대학 실험실에서 조직분리를 경험했기 때문에 난, 튤립, 아이리스 등 화훼작물의 종자를 개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그는 애초부터 일본에 꽃을 수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종자개량과 함께 고품질 꽃을 생산하기 위한 시설을 갖췄다. 그는 비싼 로열티도 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개발한 품종이 일본으로부터 인기를 모아 매년 수출실적이 증가하고 있다. P씨는 첨단장비를 마련해 모든 관리가 자동으로 이뤄지고 있다. 부인도 농촌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유형3 / 수입개방 파고에 '좌초된 꿈'
직장을 정년퇴임한 L씨는 퇴직금으로 땅을 마련해 농촌으로 들어갔다. 그는 마땅한 영농대상을 찾지 못하다가 포도 묘목을 구해 과수원을 조성했다. 그러나 정부는 한·칠레 FTA(자유무역협정)를 체결하고 칠레와의 시장개방을 이뤄졌다. 이 과정에 그는 포도값이 생각보다 낮았으며, 매년 수익률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정부가 과수원폐원보상을 발표하자 L씨는 이대로 하다가는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융자금도 갚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그의 가족은 모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부인이 화장품 판매에 나선 것은 물론 그 또한 부업으로 보험영업을 병행하고 있다.
▶유형4 / 탄탄한 경험 밑천 '성공 예약'
도시에서 음식점 배달, 공장 용접공 등을 전전하던 C씨는 IMF의 여파로 그 자리마저 잃고 농촌으로 돌아왔다. 뭔가 농촌에서도 비전이 있을 거라며 그는 도드람양돈조합 조합원인 견실한 양돈농가를 찾았다. 그는 농장주에게 인건비는 한달 용돈만 주고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그 농장에서 2년간을 일했다. 그리고 그는 인공수정, 사료급여, 새끼빼기, 분뇨냄새 제거, 돈분의 재활용, 가축질병 예방 등 여러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며 시스템과 노하우를 터득해갔다. 그는 이후 그곳의 경험을 바탕으로 배울 것은 배우고 개선할 점은 자신의 농장에 적용해 양돈장을 마련했다. 그리고 자신도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전국귀농운동본부- 이병철 본부장
귀농 기대치 낮추고 진짜 농촌사람 돼야 정부 지원대책 절실
최근 귀농자들은 주로 30대 중반∼40대 초반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IMF 직후 귀농자들이 생계형이었던 반면 이들은 도시 삶의 대안을 찾는 '생태귀농'이라 표현할 수 있다. 목적은 변했지만 귀농자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60∼70%가 탈농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귀농자들이 농업소득에 대한 기대치를 너무 높게 잡고, 교육여건·문화시설 등을 도시와 같이 기대하는 등 몸은 농촌에 있으나 사고는 도시에 있기 때문이다. 귀농에 성공하려면 농업·농촌의 경제적 가치보다 자연·생태 등 다양한 가치를 찾아야 한다.
귀농이 중요한 것은 농업·농촌의 희망이 젊은 농업인력 확보에 있으며, 이는 귀농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안이나 장수군 등 일부 지자체가 펼치고 있는 빈집알선, 농지임대 등을 제외하면 중앙정부·지자체 모두 귀농지원 프로그램은 전무하다.
일본만 봐도 중앙정부 차원에서 자금지원이 이뤄지며, 5년이상 정착할 경우 이 융자금을 탕감해준다. 또한 지자체도 귀농자 유치 박람회를 개최하고, 농촌정착이 이뤄질 때까지 2년정도 농협이나 정부기관의 임시직원으로 고용해 생계수단을 마련해 준다.
우리 농업현실을 볼 때 젊은 귀농자 유치만이 농업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더 늦기 전에 정부와 지자체는 귀농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또한 귀농자도 자신의 귀농목표를 정확히 세우고, 도시의 때를 씻고 농촌사람으로 살아가는 적극적인 삶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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